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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독일

2017.Spring.Frankfurt.Niederrad

영화로운 나무 2018. 3. 15. 23:23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날을 나는 절대 잊을 수 없다.

예상치못한 결과로 인한 충격이 너무 컸고

그 충격은 여느 때의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혹은 조금 다른 종류의 충격이었기에

그렇다. 

그날의 날씨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카페창밖은 분명 어둑어둑했다.

내 얼굴은 그 어스름 속 환한 카페 불빛 아래서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몇십분 째 지켜보고 있던 개표 방송은 이상하리만치 나를 긴장되게 했다.

원래 이렇게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 개표가 아닌데

이 후보와 저 후보의 대결이 이렇게 치열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내 얼굴은 이미 평정심을 잃고 시간이 지날수록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결과가 확정되는 순간

유력하다는 문구가 나올 때부터 벌렁거리던 내 가슴은,

실낱같던 희망을 붙잡고 있던 내 가슴은

처절하게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민주주의가 최선을 뽑아내진 못할지언정

최악을 가려내기 위한 체제이거늘

최악을 선출해버린 이 세상에서

나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이 혹은 강하게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불확정적인 것인가를 그때 가장 지리멸렬하게 깨달은 것 같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4년이나 그녀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도록 내버려둬야 했다니!

그래도, 4년 후에라도 그녀를 탄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전적으로 그녀 때문에 외국행을 택한 건 아니지만

나는 여차저차해서 외국행을 택했다.

떠나온 이유가 어쨌든 그녀가 통치하고 있는 한국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던

나는 비겁한 소시민이었다.


그렇게 외국에 있던 나는 프랑크프루트 총영사관에 볼일이 있어 가게 되었다.

우중충한 하늘과 

대사관 및 회사들이 몰려있어서 나름 고층빌딩이 꽤 밀집해 있었음에도

아니 그래서인지 더더욱 휑해보이던 Niederrad는 

꼭 그 당시, 그리고 그 이전의 어두침침하던 한국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국이 아닌 이곳에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날을 맞이했다.

4년 전 무너져내렸던 내 가슴은 다시 부풀어 올랐다.

마지막으로 가본 지 수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독일어를 못해 어떻게 읽어야 할 지도 모르겠는 Niederrad역의 모습은 너무나 새로웠다.

날씨까지 받쳐줘서 그런 것일까.

똑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을 Niederrad의 모습은 나의 조용한 환희와 끈적한 감동으로 가득찼다.


내가 머물던 곳에서 총영사관까지의 여정은 이렇다.

1시간쯤 시외버스를 타고 프랑크프루트 시내에 도착해 전차를 타고 10여분쯤 더 갔을까,

그렇게 Niederrad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도보로 15분에서 20분쯤 혹은

역밖 정류장에서 또 다른 전차를 타고 5분쯤 (기다리는 시간까지 하면 10분은 더) 걸린다.

이번엔 도보로 갔는데 엄청 헤매다가 30분쯤 걸린 것 같다.


귀찮다면 참 귀찮고 꽤 복잡한 여정 속에서도 나는 쉬지 않고 설레었고 지쳐도 지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내가 4년 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회적 결과와

증오로 가득차있던 체제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녹아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이렇게 열심히 찾아가 투표를 하면 이번엔 최악은 확실히 피할 거라는 생각에 보상받는 기분도 들었다.



정말 하필 날씨도 좋았다.

굉장히 오버스럽지만 투표 후, 개표 후, 새 대통령을 선출한 후 우리 한국의 모습이라 느꼈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대통령 하나 바꼈다고 우리 사회가 대번혁을 거쳐서 몇년 만에 내가 원하는 사회로 탈바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매년, 매달, 매번, 매순간 희망이 없다못해 희망의 씨를 말려버리는 것만 같던 지난 정치를 되돌아보자면

앞으로는 적어도 정상적인 '정치(政治)'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정상적인 정치에 훼방을 놓는 세력이 아직까지 보이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숨겨져 왔던 것들이 많이 드러나고 공론화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나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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