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목의 인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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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북유럽

2010.Winter.Ørstedsparken.Denmark

영화로운 나무 2024. 2. 8. 23:59

「모든 나는 사랑받는다」는 책이름에 확 끌려 박규현 시인의 시집을 샀다. 

책이름과 달리 이해가 어려운, 꽤나 난해한 시들이 가득한 가운데 재밌는 시들도 가득 했다.

그중 '클레이', '도쿄, 로쿄', '재설'이라는 시가 쭉 이어지는 곳에선 삼연속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무언가에 홀린 듯 10년도 더 된 여행 사진첩을 뒤적거린다.

어느 도시로든 여행을 떠나면 그곳의 공원을 꼭 들린다.

반드시 가야할 목적지로 정한다기보다 걷기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어디든 걸어다녀 버릇하다보니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공원 몇 개 정도는 쉽사리 마주칠 수 있는 것이니까.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든 들러 한바퀴, 그리고 또 한바퀴를 정처없이 도는 것이다. 

박규현 시인의 '클레이'라는 시에서는 찰흙으로 작은 공을 만들고 그것을 지구라 칭한다. 

지구는 구르기도 하고 아무 기록에 남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구르기"를 성실하게 한다. 자라기도 하고 말을 배우고 혀를 찰 줄도 알게 되었다는 그 '지구'는 어느 날이었을까, 쓰다듬었더니 마른 점토가 묻어나오기도 한단다. 

그래서 나는 이게 개를 의미하는 걸까? 사람을 의미하는 걸까?

아마도 나 자신을 가리키는 거겠지? 그러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 하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까?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다 맨 마지막 구절에서 근거없는 공감이 폭발하듯 샘솟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스물한살에서 스물두살로 넘어가던 새해에 나홀로 북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저 추운 겨울에 걸맞는 하얀 눈을 보고 싶다는, 그리고 그 안에서 요정 따위의 것들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간단명료한 소망에서였다. 

그곳에선 차가운 공기를 피부로 느끼느라 별 의미같은 걸 찾을 정신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곳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계속 그때의 북유럽 여행의 의미를 정의내리고 싶어해왔다. 그런데 그때 여행은 돈을 극한으로 아껴가며 하던 어린 날의 여행이라 딱히 한 게 없어서 어떠한 거창한 의미를 내리자니 결코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입장료 아끼려고 들린 곳은 적고 유학생활 중에 간 여행이라 계획을 잘 짜고 간 것도 아니어서 딱히 한 것도 정말 없고 북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 먹은 것도 매우 별 볼일 없었던 그 여행은 단, 정말 모험같았다. 그 추어도 잊지 못할 차갑고 따뜻한 기억들이 의미라면 의미일까.   

이름도 어려운 이 공원은 티볼리 공원과 로젠보르크 성 중간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티볼리 공원의 화려함과 로젠보르크 성 가든의 웅장함에 비하면 아담하고 소박한 느낌마저 드는 공원이지만, 호수가 공원 한가운데 뻥 뚫린 것 마냥 넓게 차지하고 있는 형태라 무언가 광활한 느낌도 주었다. 무엇보다 코펜하겐에서 맨처음 만난 공원이어서 그런가 왠지 애정이 갔다. 지금도 여기 사진을 보고있자면 그때의 차가움과 설렘이 전달되는 듯 하다.

공원은 조용하고 운치있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마치 덴마크를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겨울이 아닌 봄에는 안그렇겠지만 왠지 스산하기도 했다. 얕게 얼어있는 호수도 앙상하게 뻗은 나무들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것들마저도 '이게 진짜 겨울이지!' 하며 반겨주는 것 같았다. 이따금씩 조깅하며 지나가는 주민들이 '내가 사람 사는 곳에 온 것은 맞구나'하는 얼척없는 깨달음을 던져주고 갔다. 

시 속의 '로쿄'는 귀신인 듯 하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쓰는 로쿄와 사진도 찍고 "비명도 절망도 없이" 맥주 맛 사탕을 핥아 먹기도 하고 즐겁게 웃기도 한다.

이리저리 발에 치이기도 하다 돌연 그것들을 다 저주한다고 한다.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쿄는
그대로 있는 편이 더 낫다

로쿄는 있고
나는 없는데

한참을 웃는다
온종일을 운다


「도쿄, 로쿄」, 박규현

여행하다 마주치는 수많은 이미지들, 멧돼지를 사냥하는 사자 동상 따위의 것들을 한참을 빤히 쳐다본다.

처음에는 처음이라 그런가 놀랍게 쳐다보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왜 만들어졌을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이상한 생각만 하다가 사진으로 담고 허무한 작별을 고한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큰 의미를 두고 만들어진 것일텐데, 나는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지만 그걸 보지 않았던 이전의 나와 그걸 본 이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나의 눈이 여행하며 본 여행지의 수많은 모습들은 내가 본 그때와 같이 그렇게 연속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면의 이미지들로 간간히 남겠지만, 그래도 그중 몇몇은 뇌리에 강하게 혹은 희미끄레하게나마 남아 나의 기억과 시간, 잠재력과 능력치를 교묘하게 바꿔놓지 않을까. 

명랑한 오리와 갈매기와 새들만이 가득한 공원에

사람도 북적이지 않는 것이 고요하고 차갑고 좋은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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