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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Poema

거센 바람의 제주

영화로운 나무 2025. 2. 9. 14:29

신을 믿지 않는 소녀가 상상했다. 만약 신이 이 땅을 빚어내었다면 한반도를 주물럭거리다 작은 보석 하나쯤 바다에 콕 끼워놓고 싶었을 거야. 빨강, 노랑, 화려한 빛이 번쩍거리는 보석은 검푸르게 반짝이는 바다엔 어울리지 않으니 짙은 초록빛이 은은하게 파들거리는 파랑새 한마리 같은 보석을 박아놓고 싶었을 거야.

그렇게 검푸른 바다 한가운데 박힌 파랑새 한마리 같은 보석은 거센 바람이 만들어낸 거친 파도에 맞고 또 맞아가며 그 매무새를 다듬어갔어. 이후의 일은 오롯이 섬이라는 보석의 몫이었지.

그래, 나는 그렇게 바다에 버려진 듯 남아있는 섬 하나를 사랑해. 뜨겁게 불타올라 첨벙첨벙 노니는 바다라는 제주도 좋지만 이렇듯 겨울을 목전에 두고 하이얗게 몰아치는 파도에 삼켜지는 그 섬을 더 사랑해. 모든 게 부서질 듯 거세게 몰아치지만 정작 부서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내 마음만 설레어.

관광객도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곳으로 숨어들어가고 그 호기롭던 낚시꾼도 멍하니 눈으로만 바다의 물결을 쫓아. 그 우중충한 하늘 아래 겨우 나온 방랑객들의 휘날리는 비옷자락을 염탐하는 시간을 소녀는 즐기곤 해. 

한껏 더 검어진 아스팔트 위에 나뒹구는 야자수 나무껍질의 한 덩어리가 항상 소녀의 눈을 사로잡지. 이 모진 땅에 옮겨심어져 결국엔 이렇게 꺾어져 버렸구나. 그래도 너는 버려진 것이 아니야. 모든 것은 바람에 끝을 맞이하기 마련이고 너는 언제나 충실하게 땅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그 아름다운 기운을 이 마을에 나누어 주었다고. 시들어진 갈색빛의 거친 숨을 위로하며 애써 눈길을 거두었다.

옆으로 흩날리는 야자수의 머리칼을 따라 소녀도 겨울을 맞이해 짧아진 머리칼을 쓸어넘겨. 겨우 휘몰아치는 바람과 좌로 우로 나뒹구는 파도를 더 잘 보려고 말이야.

간혹 햇빛이 쨍하고 비치면 저멀리 검푸르던 바다색이 에메랄드로 빛나. 정말 그 바다에서는 빛이 나. 눈부심 없이 빛을 발하는 그 바다를 사랑해. 그러한 빛에도 굴하지 않고, 그 어떤 구름이 막아서도 바다는 아랑곳않고 흙탕물을 만들지. 거세게, 더 거세게.

그렇게 바다는 하이얀 파도로 모래들을 들쳐엎었어. 그 거센 소용돌이 안으로 한번 빨려들어간 적이 있었어. 나는 매번 그때의 악몽과 희열로 되돌아가. 내가 거의 알몸된 동물로 고꾸라졌던 것처럼 보말도, 소라게도, 우럭도, 숭어도 모두 고꾸라지고 또 튀어오르겠지. 그저 언제나처럼 물의 가득차있음을 느끼면서.

이 야멸찬 폭풍우 앞에선 모두 조용할거야. 드디어 이 휘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이 바다를 뜨겁게 달구던 횃불을 떨구겠거니. 나는 내 머리칼이 내 뺨을 자꾸만 발갛게 내리쳐도 자연이 가장 강해지는 시간을 경외해. 온전히 그것에 행복해서 내 머리칼 정도는 안중에도 없어. 아마 집채만한 파도가 나에게 머리를 모두 자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굴복해 태초의 나로 돌아갈테니까.

차갑고 거세고 시끄럽게 고요한 너의 소리를, 느낌을, 움직임을 진정 사랑해. 소녀는 이걸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문득 했어. 이대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혹은 더 얻지 못해도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짧고 굵었던 그녀의 인생에서 절대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반짝임이었어. 그녀는 알았을거야. 이러한 반짝임이 이 세상 속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아니한다 해도 이것은 나홀로 외로이 감당해야 할 매우 작은 선물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언젠가 무너져내릴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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