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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계의 미학

가을

영화로운 나무 2018. 1. 11. 20:52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1년 전 우리는 따뜻한 가을의 한국에 있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오고보니 너무나도 짧았던 1년이 지나고

또다시 돌아온 가을의 계절에

우리는 지금, 겨울마냥 추운 가을의 영국에 있다.

봄은 항상 돌아오지만 언제나 새로운 시작에 가슴뛰기 바쁘다.

여름도 항상 돌아오지만 우리는 뜨거운 태양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즐기기에 바쁘다.

항상 돌아오는 겨울은 그 차가움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따뜻한 어루만짐에 동조하기 바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하필 가을에, 마음에 짬이 나서 사진을 뒤적이고 글을 끄적인다.


사랑한다는 우리 사이에

또 사랑한다는 작은 인간이 등장했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마치 남이 말하듯 흘려보내는 투가 아니라

너무 깊은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말이라 괜히 그 무게를 더하고 싶어 돌려말하는 투이다.


이 작은 인간과 새로운 것은 꾸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고서는 젊은 우리를 늙게 만들러 온 것이 마치 자신의 사명인 듯 최선을 다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내가 살고 있던 도시의 단점을 투덜거리며 비판하기에 바쁘기도 했다.

그래, 나는 참 이래저래 바쁘게 살았다.

특히 더 바빴던 것은 그 작은 인간과 이런 따뜻한 추억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항상 비판하던 그 도시에도 내 마음 하나 뉘인 곳은 많았다.

사실 그땐 이게 추억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낭만에 젖어들 시간이 없을만큼 바빴다.

그래서 그 순간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향했다.

그래 그 순간, 그것뿐이었다.


나는 바쁘게 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 누가 그러랴만은.

하지만 이 작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바쁨은

직장에서 만드는 바쁨과

자기계발에 드는 바쁨과

인간관계에 치여 생기는 바쁨과는

다행히 차원이 달랐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지만

내 안에서는 모든 유가 무로 돌아가는 자정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자칫 반어법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자정현상에 만족할 때가 많다.

그것은 좀 덜 영악하고 덜 이기적이며 좀 더 본능적이라 순수하고 더 실천적인 것이다.



저 사진을 찍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여유롭게 바빴던 그날의 기분을.

저날 우리는 분명 바빴다.

아이를 준비시키고 저기까지 도달하는 것만도 어찌나 길이 복잡하고 멀던지.

그런데도 충분히 따뜻했던 햇살, 그 포근했던 날의 공기 때문이었을까.

그 작은 인간의 변을 내려주고 손수건으로 젖은 손을 서로 닦아내며 공중 화장실에서 밖으로 나왔는데 풍경이 이만저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사색할 정도까지의 시간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내 가슴 속에선 분명 그 정도까지의 행복이, 내가 사색할 때 꼬물꼬물 피어오르던 그 일렁임이

참 바쁘게도 꽃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과 연애할 때는 그 어떤 곳에 가도 도처에 낭만이 가득이었다.

그렇기에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서 여행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한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로 뿌려놓은 이 작은 인간,

이 작은 인간과 함께할 때는 아무리 포장하고 극복해보려고 해도 결국엔 제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인정 또한 나에게는 투쟁의 일환이긴 하지만.

우리는 장소와 시간을 더이상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꼭 이에 따른 결론으로 저 장소에 다다른 것은 아니지만

어찌됐건 경복궁은 작은 인간과도 함께하기 좋은 곳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아니 저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경복궁에서 데이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그리 단순하지 않지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내가 사랑하는 작은 인간, 내 새끼가 아니었다면

나는 경복궁 공중 화장실에서 바삐 나오며 아직 젖은 내 손에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깥 바람의 느낌으로 낭만을 찾진 못했을 것이다.

경복궁 곳곳의 좁고 넓은 통로들을 걷지도 뛰지도 않는 걸음으로 쏘다니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커다란 웃음을 뱉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곳곳의 옛되고 앳된 모습을 눈이 아닌 손의 촉감에 엉덩이의 안착감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는 왜 나에게 이런 바쁜 시간과 마음들을 주었느냐'

나 자신에게 묻고 답한다.

나의 애착과 선택들이 빚어놓은, 최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들의 투영이라고.

그것을 주고 받으려고 벌인 삶의 계획이고 전략이고 흔적이라고.



쌩뚱맞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밀접하게 연관된 생각이 문득 든다.

결국 사람은 육체적인 노동으로 진정한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에 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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