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목의 인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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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의 인생, 일기

추억의 냄새 하나, 크레파스 향

영화로운 나무 2019. 3. 22. 06:04

2019년 3월 어느 날의 일기.


일을 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갔다. 

다행히 근처에 공원이 있으니. 

바람은 불지 않았다. 

바람이 불 것 마냥 온 하늘이 회색 구름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비가 온 후라 공기가 촉촉했다. 

큰 비는 아니었고 그저 보슬거리는 가벼운 비였으리라. 

흙밭이 푹 푹 꺼지지는 않아서 들판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무에까지 도달했다. 

나를 그리로 이끈 것은 놀라움이었다. 

이렇게 낮고 작은 나무가 벚나무였다니! 

내가 지금껏 봐 온 벚나무와는 사뭇 달랐다. 

내 고향 제주에는 키 크고 가지가 풍성하게 뻗어나간 벚나무들 천지인데 어찌 이리 내 키만치 작고 가지가 엉성한지. 

그동안 오가며 자주보던 그 나무에 봄을 알리듯 쭈뼛쭈뼛 피어난 벚꽃을 보고야 알아챈 것이다. 

그마저도 비에 젖었지만 그래도 꽃이 피어나니 그 나무는 제 아름다움을 거기서 찾은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진짜 벚꽃이 맞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별생각없이 들이민 코끝에서 신기한 향이 퍼졌다. 

어, 어! 이건 분명 크레파스 냄새였다. 

더 큰 놀라움으로 다시 한번, 또 한번 개처럼 킁킁거리며 한동안 냄새를 맡았다. 

아, 비에 젖은 벚꽃에서는 크레파스 냄새가 나는 것인가?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 나는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야 했다. 

이곳의 냄새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이곳의 땅이 이곳의 기후와 나무와 꽃과 만나 피어난 냄새일 것이다. 

내가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다. 

분명 같은 것이라도 장소에 따라 공기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냄새와 역사는 다르다. 

더러는 그걸 대하는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이제부터 내 힘든 날 영국 어느 한 공원에서의 산책은 크레파스향으로 기억되겠지.

촉촉하다 못해 축축한 공기와 회색빛 하늘, 비에 젖어 피다만 벚꽃잎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