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목의 인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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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그리고 새하얀 길에 선 경찰

영화로운 나무 2023. 2. 3. 00:40

2023년 설 연휴의 끝자락, 제주에 폭설이 내렸고 수십개의 항공편이 결항되었다.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 아닌가. 설 연휴 동안 하얀 눈 실컷 감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연휴 끝에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다니 말이다.

그래도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는 사람들을 그리 오랫동안 붙잡을 생각이 없다. 남녘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 지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하루이틀이면 다 녹아 없어지니까(물론 비행기 결항은 눈보다도 거센 바람이 더 주요한 원인이지만). 그런데 웬걸- 역시나 내가 사는 바닷가 동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얀눈이 다 녹아 없어졌지만 그후 겨우 삼일만에 다시 내리고, 다시 쌓였다. 그것도 매우 소복이.


쌓인 눈을 좋아한다. 제주에는, 제주 바닷가 동네에는 눈이 쌓여있는 기간이 항상 길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지겹지도 않고 거의 항상 거센 눈보라를 동반하니 눈이 내리고 쌓이는 모습이 갑작스러운 느낌도 드는데, 그렇게 '세상'이라는 화면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 그것이 주는 생경함이 있다. 나는 그 생경함이 좋다. 또 쌓여도 금방 녹을 것을 알고 있으니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도 있다. 그러한 불안함은 아쉬움이기도 하지만 애틋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애틋한 감정은 분명 우리를 설레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하얗고 고요하고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운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마냥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아니, 버스를 타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좁은 제주에서 출퇴근 시간이 굉장히 광활하게 확장되버리기 때문에.

강원도처럼 눈이 매해 오랜 기간 쌓여있는 지역이라면, 물론 그곳도 똑같이 위험하긴 하겠지만 적어도 눈길에 대한 대비가 더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스노우타이어 마저 겨우 며칠 쓸 건데 몇십몇백을 왜 쓰냐며 버림받은 지역이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하다. (물론 쓰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스노우타이어 쓰는 사람은 육지에서 오신 분이지만 말이다.) 체인도 시내에서는 장시간 쓸일이 거의 없어 눈이 한번 오고 나면 아스팔트에 끊겨서 방치된 체인들이 종종 보인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시내 길이 눈길이오 빙판길이라면.. 짧은길도 정말 기나긴 여행길이 되버린다. 거의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체인없이 초저속으로 기어다닌다. 일단 난 출근은 해버렸기 때문에.. 출근길은 말라있었으므로… 그렇게 비극은 몇시간만에 들이닥쳤다.

출근 후 겨우 1시간 경과,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창문으로 밖을 보니 또 너무 급작스럽게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엥? 여긴 산지도 아니고 시내인데.. 좀… 일찍 많이 오네? 하지만 얼마 못 가 쌓이지 못하고 그치겠지. 흔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눈보라는 그냥 조용히 내리는 보통의 눈이 되지 못하고 계속 매서운 바람과 휘몰아쳤다. 파들파들 내리는 함박눈이었으면 마음이라도 더 고요했을까. 제주의 눈은 왠만하면 거센 바람을 동반하여 다양한 각도로 휘몰아친다. 위에서 아래로 곧장 내리지 못하고 옆으로 뻗어가는 눈송이들을 나는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감상한 시간은 겨우 몇초일 것이고 내가 서둘러 몇분동안 들여다본 것은 교통상황을 보여주는 cctv 사이트였다. 음.. 아직 다행히 우리 동네에만 세차게 오고 있구만. 이것은 이 눈바람이 다른 동네로 이동할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 동네는 몇십분쯤 후 다시 갤 것이다. 쨍하게 개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시내에는 차들이 계속 다녀주기 때문에) 찻길은 녹아있겠지.

그리고 몇시간 후 그 눈구름은 정말 내가 사는 동네 윗쪽으로 이동해갔다. 결국 나는 이곳에서 출발은 어찌어찌 할 것 같지만 우리 동네 근처에서 헤매게 되겠구나.. 하는 조삼모사격 결말.

그러다 시내에서 한라산쪽으로 올라가는 관문격인 제주대 도로를 비추는 cctv를 눌러 보고선 말문이 막혔다. 역시 높은 지대에 걸맞는 새하얀 비쥬얼. 길이 새하얀 건 당연한 것이고 공기중마저 새하얘서 화면이 뿌옇게 보였다. 그 희뿌연 화면 한가운데에 형광물질을 두른 사내 하나가 장난감처럼 서있었다.

안감이 털로 가득찬 방한복은 입었겠지만서도 얼굴에 불어닥치는 바람(만이면 제주 사람에겐 익숙하지만), 그보다 더한 눈꽃싸다구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 것일까. 내가 저 사람이었다면 분명 왔다리갔다리 운동량이나마 늘려볼까 안절부절 못했을텐데.. cctv 속 경찰관님의 움직임은 과도하게 표현해봤자 꼼지락거리는 수준이었다. cctv 화면이 작아서일까. cctv 재생 속도에 약간의 버퍼링이 있을테니 저 사람의 모습도, 그 움직임에도 버퍼링이 걸린 것일 뿐일까. 꽤 가만히 있다가 겨우 손에 꼽을 만한 수의 보폭으로만 움직이곤 했다.

춥지 않을까.
춥지 않을까.
정말 괜찮은걸까.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나로서는 내 존재 자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존재 자체가 경이로웠다. 말이 좋아서 그렇지.. 솔직히 그냥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간지대의 도로는 눈 적설량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빙결도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산간지대의 도로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올라가는 차를 통제하는 업무. 사고의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에.

(사진은 내용과 직접적인? 상관없는 밤, 시내도로 풍경)

 

굳이굳이 쏟아져내리는 눈보라를 뚫고 기어코 올라가려는 차들을 일일이 세우고 창문 너머로 이야기를 나눈다. 어디까지 가시냐고 묻겠지? 아닌가.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더이상 가실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으실까. 그래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저 눈보라 한가운데 장막도 천막도 없이, 심지어 옷에 걸친 우비 하나 없이 꿋꿋하고 꼿꼿하게 서있는 저 경찰분을 보고 정말 강력하게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가능한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꼭 가야만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체인과 같은 장비를 갖추었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통제 업무에 장막을 쳐줄 수도 천막을 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시적인 상황에 그만한 비용을 투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니.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경찰의 몸이 얼어붙는다면 투자해야지. 문제는 그걸 설치하는 데 경찰의 업무가 늘어날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제주의 눈보라는 그 장막과 천막을 일시에 날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어딘가 날아가 꽂혀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찰분들은 이런 내 글을 읽으면서 이 무슨 어처구니 없고 뜬금없는 글일까 싶을 수도 있겠다. 내가 그들의 고충과 업무를 어떻게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여하튼 나는 내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매우 기능이 좋은 방한복을 입고 그 방한복 안팎으로 핫팩도 여러곳에 끼워넣었는데다가 경찰차 안 히터는 또 매우 빵빵한 경찰분들의 근무 환경(?)을 강력히 가정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해보지만.. 난 근데, 정말 그저, 어쩌면 매우 개인적으로, 저 새하얀 대도로 한가운데 서있는 경찰분들의 노고를 감히 헤아릴 수 없음에 가슴이 턱- 막혔다.

그 노고가 그분들이 서있는 소리없는 cctv 화면의 적막처럼 너무 고요해서 이상했다.

그들의 서있음은 몇분, 몇십분에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리고 간간히 줄어듦에도 차들은 계속해서 올라왔고 오전, 오후 구분없이 그들은 서있었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마 cctv에 찍힐 수 있도록 최적의 자리에 서서 언제나 그랬다는 듯 무심하게 서있다.

너무나 당연한 일.

운전자의 입장에서만 보다가, 시민의 입장에서만 보다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숨이 턱 막히는 일. 시민의 입장에서도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 그럼 네가 가서 해봐라고 등떠밀면 오돌오돌 떨면서 상사를 분노로 삼킬 일. 근데 그 상사가 나라고 국민이면 그 사람들은 어떠한 분노를 삼키고 있을까. 뭐.. 과연 분노의 대상인 실질적 상사가 나라고 국민일까… 싶고, 대부분의 경찰분들은 나같이 얄팍한 생각을 하지 않을테니까 분노가 없거나 매우 얕으시겠지.. 싶지만. 나는 그래도 너무 추웠다.

추위를 안타는 편인 나는 그들이 너무 추웠다.

 

새하얗게 쌓인 눈은 아무런 죄가 없고 티없이 맑고 아름다운데 거기 올라선 쇳덩어리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그래서 그 안과 밖에 갇힌 사람들이 매우 불쌍해지는 낮과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