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목의 인생담

초가을, 아직도 찐득찐득함에 노하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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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아직도 찐득찐득함에 노하여.

영화로운 나무 2023. 9. 22. 01:23

어제까지는 너무 더웠다. 여름마다, 특히 9월 중순엔 항상 하는 지겹지만 너무 적절해서 꼭 필요한 말.

“와, 아직까지 덥네. 언제까지 더우려나?”

뭐, 언제까지 더운지 알면 어쩌려고. 어쩌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이말을 지겹도록 반복한다. 그렇게 올해 9월 중순의 일상도 작년, 재작년의 9월 중순과 같이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 이말이 지겹지 않을까. 그들을 더욱 덥거나 짜증나게 만드는 것는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든 그들을 위해서든 그말을 하는 대신에 이 끝더위의 찐득찐득함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을까.

혹은 적어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덜 지겨운 말이 있을까?

그러다 라디오에서 가을이라는 계절을 표현하는 말을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 시인의 표현이었다.

가을은 여름이 타다 남은 것이다.


마침 뜨거운 햇살이 차창안으로 들어와 우회전을 앞두고 우측을 살피던 나의 시야를 가렸다. 평소대로라면 이마를 찌푸렸겠지만 그러한 뜨겁게 뿌연 빛마저 순간 경이롭게 느껴지는 표현이었다.

여름이 타다남은 계절이라니!

무언가 맹렬하게 타다 남은 모든 것들은 왠만하면 보잘 것 없거나 부질없는 것들일 것이다. 모닥불이건 사랑이건 초대형 불꽃놀이 축제건 새까만 바다 한켠에서 소소하게 즐기는 젊은 무리의 작은 불꽃놀이건 타는 순간들을 위한 맹렬함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것들은 대게 애매한 색깔의 재이거나 어떠한 것의 부재, 지쳐버린 육체와 정신적 찌꺼기, 또는 어느 물고기의 등살에 작살처럼 박혀버릴 불꽃놀이 스틱이니까.

그래서 가을은, 특히 늦가을은 뜨겁게 타올랐던 여름이 타다 남은 것들이라서, 이리도 지겹도록 애매하게 찐득찐득한 것이었구나. 그렇게 타다 남은 찐득찐득한 더위를 내 목덜미에 덕지덕지 붙여놓고선 한껏 허망하게 쨍한 햇빛을 내리쬐고 또 이따금씩 다가오는 잔잔한 바람으로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그래도 그러한 끈기와 변덕이 아름답게 뜨거웠던 여름이 타다 남은 것들이라 하니 괜히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약간의 연민도 포함된 것 같다. 무더운 여름에 불만도 많지만 애정도 큰 만큼 그 여름이 열정적으로 타다 무언가가 남았다니. 그 남은 것들이 내 주변에 부유하고 있다니.

내가 여름을 꽤나 열심히 불태워서 이런 쓸데없는 감성들이 피어오르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진부하고 꽤나 괴로운 초가을에 대한 나의 투정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여름이 참 잘도 탔구나!“
”여름 재가 내몸에 들러붙네. (어이구 불쾌해!)“

결국 나의 불쾌함은 감추지 못한 채 그저 여름이 징글징글하게 무더웠어도 그 나름의 반짝임이 있었던 것처럼, 그것이 매우 소중한 추억임에 감사하는 마음처럼, 가을도 그 나름의 찬란함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걸 더 매혹적으로 느끼기 위한 조금의 희생이자 에피타이저라고 생각하자.



재재작년의 9월 중순은 이렇지 않았다. 그때 내가 있던 곳은 여름과 가을의 경계가 굉장히 모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땐 타다 남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반짝 더웠던 고작 며칠의 땡볕이 그 어떤 초록도, 빨강도, 파랑도 태우지 못했을 때 조금씩이나마 그을렸던 작은 것들이 분명 어딘가에 들러붙어 선선하고 쌀쌀한 가을을 맞이했겠지. 선선한 여유와 쌀쌀한 관계에 가려서 그 작은 것들을 잘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애써 지은 미소로 조금씩 외로이 그 작은 부유물들 중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 마음에 담을 때 내 작은 아이가 내옆에 있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 애매한 계절과 시간에, 곁에 있던 푸르고 빨갛고 노랗고 하이얀 모든 것들이 너무나 소중해서.